1970년대 자운서원 정비사업을 기억하며

‘자운서원’은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기슭에 율곡 선생의 묘와 신사임당 묘를 비롯한 덕수 이씨 가족묘 13기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이곳 자운서원은 광해군 7년인 1615년, 조선중기 대학자인 율곡 이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방 유림들이 창건하였다.

이이 선생은 1650년, 효종 원년에 자운이좌 사액을 받았고 그 뒤 1713년 숙종 39년에 그 후학인 사계 김장생(1548~1631)과 현석 박세채(1632~1695) 두 분을 추가로 배향했다. 자운서원은 율곡 선생의 위패를 가운데 모시고 좌우로 김장생과 박세채 두 분의 위패를 모신 가운데 지방교육을 담당했으나 조선후기 1868년인 고종 5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빈터에 묘정비(廟庭碑)만 남아 있다가 1910년 유림들의 기금과 국가지원금을 받아 복원되었다.

1973년까지만 하더라도 자운서원 경내에는 28세대 150여 명의 주민들은 전답과 집터까지 모두‘덕수 이씨’위토(位土)를 생활터전으로 삼고, 근 300여 년간 덕수 이씨 가족묘에 제례봉사하며 가난하게 살아왔다. 매년 제사 때가 되면, 덕수 이씨 종중의 지시에 따라 자신이 경작하는 위토의 면적에 비례하여 제물을 준비하고, 마을의 남녀노소 모두 다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모여든 덕수 이씨 종중원의 식사준비와 제사상을 묘소까지 운반하는 하는 등 제사에 총동원되었다.

1973년 자운서원과 화석정을 성역화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문화재 담당부서인 공보실에서 그해 6월경, 자운서원과 화석정의 경내 정비사업비를 조사, 산출하여 도에 보고하기 위해 내무과장이었던 내게 협조 사인을 받으러 왔다.

내용을 검토해 보니, 자운서원 내 28동의 주택가격 300만 원, 화석정 2동의 주택가격이 60만 원, 해서 모두 360만 원을 산출하였다. 주택 가격은 최저 3만 원에서 최고 20만 원으로 평가한 금액이었다.

물론, 자운서원 경내의 주택은 벽체와 담이 헐어지고 집은 자체적으로 버티기가 어려워 버팀목으로 의지할 정도여서 단돈 만 원을 주고도 살 사람이 없을 만큼 주택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아주 낡은 집들이었다. 그러나 통일로 정비사업의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주택가격 산출에 문제가 있다고 보였다. 만일, 현재 조사된 금액으로 주택을 이전하라고 한다면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니 주택신축 상황을 고려하여 주택가격을 재조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공보실에서는 사전에 도와 협의된 내용이고 사업 시작 시 재조사를 할 것이니 그대로 보고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만일, 파주군이 보고한 그대로 사업을 하라고 하면 그때에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했다.

그해 10월 초순, 청와대 조경담당 오 비서관이 우광선 파주군수를 청와대로 불러 파주군의 자운서원과 화석정 정비사업 내용을 대통령께 보고하였더니, 파주군수가 요구한 금액을 한 푼도 삭감하지 말라고 부탁하시면서 그대로 승인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금년 내로 자운서원 경내 주택을 완전 철거하고 사업을 완료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니 차질 없이 사업을 수행하라고 했다. 당시, 대통령의 지시라면 어떠한 경우에라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다음 날 군수는 참모회의에서 이 사업은 원래 공보실 소관이지만, 여러 가지 여건을 감안할 때, 내무과장이 책임지고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지시했다.

어쩔 수 없이 업무를 수행하기로 했지만 자운서원 정비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많았다.

첫째는 주택철거에 대해 주민들을 설득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사업비 부족에 대한 추가자금 조달 문제였고, 셋째는 이주택지 확보의 문제가 있었고, 넷째로는 동절기에 이주주택을 건설해야 하는 등 시작 전부터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제일 먼저 주민을 설득하기 위하여 마을주민회의를 열어 사업의 목적과 추진계획 등을 설명하였으나 전체 주민들은 엄동설한에 주택을 이주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렇더라도 나는 이주대책 수립을 위하여 매일같이 부락에 들어가 이장과 마을 유지들을 만나 설득하였다.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청취하러 갈 때마다 마을 한가운데 달아 놓은 종을 쳐서 주민들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

주민을 설득하는 일은 너무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이니 내 나름으로는 이해했다.

주민의 의사를 최대한 수용하려 노력하여도 오늘의 동의가 내일이면 바뀌는 데에는 질색할 노릇이었다. 그래서 주민과의 협상에서 주민 의견을 최대한 수용하면서 시의 계획을 설득할 지도력 있는 청년을 만났다.

청년은 해병대 출신으로 그 동네에 데릴사위로 들어와 사는 씩씩하고 기세가 등등한 청년이었다. 그 청년과 법원읍에 있는 중국집에서 만나 고량주를 마시면서 부탁했다. 청년에게 부탁한 내용은 대략 아래의 내용들이었다.

주민과 협상할 때 시의 계획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주민의 요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동의하여 실속을 차리는 쪽으로 설득해 달라고 했다. 그 후로 마을회의 분위기는 많이 호전되었다.

부부동반 주민회의를 개최하며 구체적인 추진계획을 다시 설명했고 주민의 요구사항을 거의 수용했다.

“당신네들은 근 300년간 대를 이어온 덕수 이씨네 묘지기의 불명예를 자손들에게까지도 또 물려줄 것인가를 잘 생각해 보라. 이주 대지는 집안의 형편에 따라 100평, 150평, 200평으로 조정하여 이전토록 하겠다. 주택은 15평, 20평으로 지어 무상으로 공급하지만 대지는 덕수 이씨 종중과 협의하여야 되므로 무상으로 준다고 할 수 없다. 금년에 주택건축이 지연되면 내년에 이주토록 한다.”

장시간 협의 끝에 위의 4가지 내용에 대한 모든 합의가 이뤄졌다. 참으로 길고도 지루한 협상이었다.

부족한 예산문제는 조병규 경기도지사에게 자운서원정비 추진계획을 보고하며 도비 1,100만 원의 지원을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고 여기에 정부 보조비 300만 원을 더해 1,400만원으로 주택 건축비를 해결했다.

이주택지를 확보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서원 바로 아래 2,000평의 밭이 있었는데, 그곳이 적지였다. 그 밭의 소유자를 알아본 결과, 법원초등학교 노영수 교장 선생의 소유였다. 이에 노 교장의 친척인 법원읍노인회 노봉현(작고) 회장에게 부탁하여 덕수 이씨네 위토인 논과 노영수 교장의 밭을 교환하되, 논 1평에 밭 2평으로 교환하는 것에 어렵게 동의를 얻었다.

덕수 이씨 위토와의 교환문제는 시간이 없어 종중에서는 당연히 협조를 할 것이라 믿고 사전협의 없이 단독으로 협의했다. 위토 교환은 율곡 선생의 14대 손인 이재능 종손과 종중의 일을 전담하고 있는 충남 논산에 거주하는 이장희(작고) 씨와 협의했다. 그 결과 국가에서 우리 조상의 묘역을 성역화해 준다는데 종중으로서 감사하며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했다.

그러나 종중 재산의 처분은 종손의 승낙만으로는 나중에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종중회의 결의서와 회의록을 첨부하여 제출토록 하여 이주택지 문제가 비로소 해결되었다. 그 후에 종중의 젊은 종원(宗員)들은 위토 교환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로 종손을 비난하고 심지어 나를 찾아와 “당신이 무엇인데 남의 재산을 좌지우지 하면서 종중을 분열시키느냐”고 항의하기까지 했다.

주택건축의 택지위치 선택에 있어서는 주민의 의사에 따라 제비를 뽑기로 했다. 주택 평수는 예산관계로 15평 14가구, 20평 14가구를 짓기로 하였다. 주택 평수 선택도 가족의 수를 감안하여 주민 스스로가 협의하여 결정짓도록 하였다. 주택건축도 주민 스스로 자기 집 건축을 관리, 감독하고 입주도 희망에 따라 들어가도록 하였다. 동절기 주택건축으로 습기가 차고 벽체는 결빙현상이 생겨 많은 고생이 뒤따르기도 했다. 사업이 완료된 후 주민과의 협상에 앞장서 준 청년은 자운서원 경비원으로 채용했다.

화석정 정비사업도 불량주택 2동의 주민 협조로 무리 없이 철거 정리하여 잘 마무리가 되었다. 1974년 5월 준공식을 가짐으로써 긴박하고 어려웠던 정비사업은 성역화사업에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주민들은 1980년 국보위에 대지도 무상으로 이전 등기하여 준다고 약속을 하고 이전 등기를 해주지 않는다며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국보위에서 현지 확인한 결과 대지 문제는 이주민이 매수하여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통보해 왔다.

주민과의 대화 시에“묘지기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한 책임이 있어서 덕수 이씨 토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평당 종중은 1,500원 주민은 1,300원을 주장하여 중간인 1,400원으로 조정하였으나, 그 조차도 매입할 돈이 여의치 않아 천현농협에 융자를 알선하여 매수하게 함으로써 묘지기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자운서원 정비사업을 한 지도 어언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가끔씩 자운서원에 가면 그때의 옛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사업시기에 쫓기고 부족한 예산을 메우기 위해 고민하던 일, 위토 사용문제로 대전의 종중회장을 찾아가 종중과의 긴박한 협상이 오가던 일, 주민의 항의 속에 그들과 무릎을 맞대고 밤을 지새우며 설득하던 일, 파주를 떠나 의정부 부시장으로 전근 가는 나에게 주민들이 집을 무상으로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묘지기에서 벗어나게 해주어 감사하다며 보신탕 오찬에 초청해 주었던 일 등 힘들고 괴로웠지만 보람 있는 일이었고 이제는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1997년 이인제 지사에게 자운서원과 반구정의 보완 사업을 건의하였다. 자운서원은 서원 내 문성사 아래 강당 건물인 강인당과 동제, 서재, 제실 그리고 외삼문을 신축하여 자운서원이 강릉의 오죽헌과 함께 율곡 선생의 대표 유적지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정비의 결과 자운서원은 국가지정문화재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매년 이곳에서는 율곡문화제가 개최되고 있다.

반구정은 청백리의 표상인 방촌 황희 정승의 노년의 혼이 담겨 있는 곳이나 시멘트로 축조되어 있었다. 이런 반구정과 앙지대 정자를 목재로 교환하고 기념관의 신축과 더불어 담장 축조, 주차장 확보함으로써 현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파주 유림에서는 매년 황희정승 탄신일인 음력 2월 10일 이곳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으며, 현재 반구정은 장수 황씨 종중에서 관리하던 것을 기부체납하여 파주시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반구정 정비사업 지원과 자운서원이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 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신 이인제 전 경기도지사에게 이글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에서>

<출처 : 파주이야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