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연보

율곡 이이의 연보

1536

∙ 12월 26일 새벽 4시 외가(강릉 북평촌-지금의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 검은 용이 동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마루 사이에 서려있는 꿈을 꾸고 낳았다고 해서 어릴 적 이름은 현룡(見龍)이며, 태어난 방은 몽룡실이다.

1538(3)

∙ 말을 배우자 곧바로 글을 읽을 줄 알았다. 하루는 외할머니가 석류를 보고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라고 묻자 “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져 있는 것과 같다(石榴皮囊碎紅珠)라고 하였다.

1540(5)

∙ 사임당이 병중이어서 온 집안이 시름에 잠겨 있는데 율곡은 외조부 사당 안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있었다.

1541(6)

∙ 강릉 외가에서 어머니를 따라 서울 집 수진방(壽進坊-지금의 청진동)으로 왔다.

1543(8)

∙ 경기도 파주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었다.

1548(13)

∙ 진사초시(進士初試)에 올랐다.

1551(16)

∙ 5월에 어머니 사임당이 별세하자 경기도 파주 자운산(紫雲山)에 장사지내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어머니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1554(19)

∙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도의(道義)의 친분을 맺고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 3월, “공자가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어질고 지혜로운 자가 그가 타고난 기를 제대로 잘 기르려면 산과 물을 버리고 어디에서 구하겠는가!”라고 하면서 홀연히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1555(20)

∙ 봄에 서울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강릉 북평촌 외할머니에게 문안을 드리러 갔다. 이 때 스스로 경계하는 글인 자경문(自警文)을 지었다.

1556(21)

∙ 봄에 수진방으로 돌아가,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뽑혔다.

1557(22)

∙ 9월에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1558(23)

∙ 봄에 경상북도 예안(禮安)에 사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을 찾아가 학문을 물었다. 그 때 계는 율곡보다 35세 위였으나 “나중에 태어난 선비도 덕을 닦고 학문을 쌓으면 얼마나 진보될지 모르니 후생(後生)이 두렵다.”라고 하였다. 그 길로 선산(善山) 매학정(梅鶴亭)에 들러 초서(草書)의 대가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를 만났다. 후에 황기로는 율곡의 아우, 옥산(玉山) 이우(李瑀)의 장인이 되었다.

1561(26)

∙ 5월에 아버지 이원수공이 별세하자 어머니 무덤에 합장하였다.

1564(29)

∙ 봄에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빈소에 찾아가 문상하고 청송의 행장을 지었다.

∙ 7월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 8월에는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첫 벼슬로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었다. 율곡은 보는 시험마다 장원으로 뽑혔는데 모두 합치면 아홉 차례나 되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아홉 번이나 장원한 분(九度壯元公)’이라고 하였다.

1565(30)

∙ 봄에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11월에는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관리를 뽑는 데 청탁을 배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1566(31)

∙ 정언에 제수되어 ‘마음을 바로잡아 정치의 근본을 세우고, 어진 사람을 가려 뽑아 조정을 깨끗이 하며 백성을 안정시켜 국가의 근본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상소하였다.

 

1567(32)

∙ 명종(明宗) 대왕이 승하하자 만사(輓詞)를 지었다.

1568(33)

∙ 2월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

∙ 4월에 장인 노경린이 별세하였다.

∙ 11월에 다시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강릉 외조모 이씨의 병환이 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돌아왔다. 이 때에 간원(諫院)에서는 ‘본시 법전에 외조모 근친하는 것은 실려 있지 않다.’ 해서 직무를 함부로 버리고 가는 것은 용서할 수 없으므로 파직시키라고 하였으나 선조 임금은 ‘비록 외조모일지라도 길러준 은혜가 있고 늙도록 아들이 없는 데다 또한 정이 간절하면 가볼 수도 있는 것이지, 효행에 관계된 일인데 어떻게 파직시킬 수 있느냐.’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1569(34)

∙ 6월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임명되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7월에 조정으로 올라왔다

∙ 9월에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올렸다.

∙ 외할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임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0월에 휴가를 얻어 강릉으로 돌아왔다. 외할머니가 90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1570(35)

∙ 4월에 교리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돌아왔다.

∙ 8월에 맏형 죽곡(竹谷) 선(璿)이 별세하였다

∙ 10월에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황해도 해주 야두촌(海州野頭村)으로 돌아갔다.

∙ 12월에 퇴계 이황의 부음을 듣고 영위를 갖추고 멀리서 곡하였으며, 아우 옥산으로 하여금 제문을 가지고 가 직접 조문케 하였다.

1571(36)

∙ 정월에 해주로부터 파주 율곡으로 돌아갔다.

∙ 여름에 다시 교리에 임명되어 의정부 검상사인(議政府檢詳舍人), 홍문관 부응교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편수관(弘文館 副應敎知製敎 兼 經筵侍讀官 春秋館編修官)으로 옮겼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해주로 돌아갔다.

∙ 6월에 청주목사(淸州牧使)에 임명되자 민생교화에 힘쓰며 손수 향약(鄕約)을 기초해서 실시케 하였다.

1572(37)

∙ 3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서울로 올라와 여름에 파주 율곡으로 돌아갔다. 이 때에 우계와 유명한 이기설(理氣說)을 논하였다.

∙ 8월에 원접사종사관, 9월에 사간원사간, 12월에 홍문관응교, 홍문관전한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573(38)

∙ 7월에 홍문관 직제학에 임명되자 병으로 사퇴하였다.

∙ 8월에 율곡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감군은(感君恩) 시를 지었다.

∙ 9월에 직제학에 임명되어 다시 올라왔다.

∙ 통정대부승정원동부승지지제교에 승진되고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을 겸임하게 되었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1574(39)

∙ 1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승진되어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어 올렸다. 일곱 가지의 시급히 고쳐야 할 폐단을 지적했는데 ‘위 아래가 서로 믿지 못하고, 일을 책임지려는 신하가 없고, 경연에는 성취하려는 의지가 없으며, 어진 이를 불러들이긴 하나 적재적소에 쓰지 못하고, 백성을 구제할 계책이 없고, 인심을 착한 곳으로 돌리려는 실상이 없다.’라고 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 3월에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4월에 병을 이유로 물러났다. 또 얼마 안 되어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율곡으로 돌아왔다.

∙ 6월에 서자 경림(景臨)이 출생하였다.

∙ 10월에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75(40)

∙ 9월에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지어 올렸다.

1576(41)

∙ 2월에 율곡으로 돌아왔다.

∙ 10월에 해주 석담으로 돌아와 청계당(聽溪堂)을 지었다.

1577(42)

∙ 1월 석담으로 돌아와 동거계사(同居戒辭)를 지었다.

∙ 12월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완성하였다.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학문의 방향을 알지 못하자 마음을 세우는 법, 구습을 개혁하는 법, 몸가짐을 바르게 가지는 법, 독서하는 법, 어버이를 섬기는 법, 남에게 처신하는 법 등을 상세히 서술하여 초학자의 지침서로 삼게 하였다.

1578(43)

∙ 우리 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인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고 주희(朱熹)의 무이도가(武夷棹歌)를 본떠 연시조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었다.

∙ 3월과 5월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며 어지러운 시국을 타개하고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방책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올렸다.

∙ 7월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涵) 선생이 별세하자 조문하고 겨울에 해주석담(海州石潭)으로 돌아왔다.

∙ 눈 속에 소를 타고 우계를 방문하였다.

1579(44)

∙ 둘째 아들 경정(景鼎)이 태어났다.

∙ 5월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사직하면서 어지러운 시국을 바로 잡을 방도를 써서 올렸다.

∙ 동인․서인이 갈라져 당파 싸움이 점점 심해져 갔으며 율곡까지 싸잡아 공박하자, 송강 정철이 탄식하며 ‘앞으로 어떻게 이들을 선비라고 부를 수 있으리요?’라고 하였다.

1580(45)

∙ 12월에 다시 대사간의 부름을 받고 나아갔다. 임금이 율곡을 보고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하였는데 하고 싶은 말이 없는가?”라고 하자, 율곡은 “임금께서 즉위하셨을 때에는 모든 백성들이 태평을 기대하였는데, 지금까지 옛 제도를 고치지 못하고 폐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계시니 어찌 발전을 보시겠습니까? 만약 옛날의 폐습을 버리지 않는다면 결코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는 가망이 없습니다. 조정의 기강이 무너져 대소 관료들이 자신의 직분을 일삼지 않는 것이 이미 고질이 되었습니다. 먼저 임금께서 자신을 닦은 뒤에 어진 선비를 불러들여 그들에게 성취의 책임을 지우게 하신다면 치도(治道)가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 사암(思菴) 박순(朴淳)이 “율곡이 조정에 나아가니 내 마음이 기뻐 잠을 이루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 4월에 백성들을 구제하는 방책을 토의하기 위한 회의를 열자고 주청하여 실시하였다.

1581(46)

∙ 6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과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으로 특별 승진하였다.

∙ 10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승진하였다.

1582(47)

∙ 1월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 7월에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과 김시습전(金時習傳), 학교모범 (學校模範)을 지었다.

∙ 8월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으며, 9월에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특별 승진하고 의금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임명되어 또다시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 10월에 명(明)나라 사신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 황홍헌(黃洪憲)과 공과급사중(工科給事中) 왕경민(王敬民)을 영접하는 원접사(遠接使)의 명령을 받고 중국 사신들을 안내하였다.

∙ 12월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어 서도(西道)의 민폐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1583(48)

∙ 2월에 시국에 대한 정책을 써서 올렸으며, 4월에 또 시국 구제에 관한 의견을 써서 올렸는데 그 내용은 불필요한 벼슬을 도태할 것, 고을들을 병합할 것, 생산을 장려할 것, 황무지를 개간할 것,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어 있는 공납(貢納)에 대한 법규를 개혁할 것, 성곽을 보수할 것, 군인의 명부를 정확히 할 것, 특히 서자들을 등용하되 곡식을 바치게 하고 또 노비들도 곡식을 가져다 바침에 따라 양민으로 허락해 줄 것 등이다. 그리고 또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10만 명의 군사를 양성하자고 주장하였다.

∙ 6월에 북쪽 오랑캐들이 국경을 침범해 들어온 사실로 삼사(三司)의 탄핵을 입어 인책 사직하고 파주 율곡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해주 석담으로 갔다.

∙ 9월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제수되고 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584(49)

∙ 1월 16일에 서울 대사동, 지금의 인사동 집에서 4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3월 20일 경기도 파주 자운산(紫雲山) 기슭 선영(先塋)에 묻혔다.